평생 자신을 작게 만들며 살아온 한 사람이 글쓰기를 통해 자기 삶의 저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그리고 그 사람을 뒤늦게 읽고 듣기 시작한 타인의 변화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숨는 도구가 자신을 드러내는 표식이 되기까지
소설의 첫 장면에서 미용은 검은 복면을 꺼내 보인다. 작고 수줍고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중년 여성과 도둑이나 저항자가 쓸 법한 복면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면 이 부조화가 작품 전체를 품는 정확한 상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용에게 복면은 숨기 위한 도구이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기 위한 도구다.
미용은 폭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울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도움을 주되 눈에 띄지 않는 아이가 되는 법을 익혔다. 어린 시절의 생존 전략은 성인이 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 친절하게 이웃을 돕지만 사람들은 그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조롱한다. 미용은 살아남았지만 자기 삶의 중심에는 서지 못했다.
재서라는 불완전한 독자
인쇄소를 운영하는 재서도 사람을 이해하는 데 서툴다. 그는 미용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직접 묻고 듣기보다 우연히 남겨진 USB 속 글을 몰래 읽는다. 돕고 싶어 하면서도 관계의 책임을 질까 두려워 침묵하고, 미용을 걱정하면서 그의 감정을 자기 상상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재서는 독자의 거울처럼 보인다. 우리도 타인의 사정을 알게 되면 쉽게 그 사람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은 ‘아는 것’과 ‘동의를 얻어 듣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재서는 미용의 글을 먼저 훔쳐 읽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미용 앞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순간 관계는 관찰자와 대상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로 바뀐다.
폭력보다 복사나무를 쓰겠다는 선택
교련 시간 장면에서 응급처치를 가르친다는 수업은 한 학생을 집단적으로 다루고 내팽개치는 시간이 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붕대법이 존엄을 훼손하는 도구로 뒤집힌다. 폭력을 멈춘 말조차 미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기보다 ‘가여운 아이’로 고정한다.
그런데 미용이 정말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 자체가 아니다. 교련 수업 전 창밖에서 본 복사나무의 새순과 떨어지는 꽃잎이다. 이는 상처를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폭력이 자기 인생 전체를 독점하게 두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미용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지만 피해만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아니다. 끔찍한 순간에도 평화를 감각했던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과거의 교사에게 빼앗겼던 서술권을 되찾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러두기
책의 일러두기는 독자에게 본문을 읽는 조건과 경계를 미리 알린다. 현실의 관계에는 그런 설명서가 없다. 우리는 상대의 과거와 금기, 두려움을 모른 채 관계를 시작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제안하는 윤리는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라는 명령보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말할 자리를 내어주라는 요청에 가깝다.
재서가 마지막에 하는 일도 미용을 구원하거나 대신 복수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글이 책이 될 수 있도록 작은 기술적 조언을 건넨다. 마지막에 미용은 복면을 얼굴에 완전히 뒤집어쓰지 않고 접어 올려 헬멧처럼 쓴다. 처음의 복면이 사라짐과 위협의 가능성을 품었다면 마지막의 복면은 스스로 통과한 의식의 표식으로 바뀐다.
읽고 난 뒤
나는 처음에는 재서의 시선을 따라 미용을 걱정했다. 그러나 걱정한다는 감정에도 우월함이 섞일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선의만으로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말을 기다리기보다 혼자 결론을 내리고, 개입할 순간에는 물러서는 선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복사나무다. 상처를 설명할 때 우리는 가해자와 폭력의 장면을 중심에 놓기 쉽다. 그러나 미용은 자신이 붙잡고 싶었던 장면이 평화롭게 움직이는 꽃술이었다고 말한다. 그 선택 덕분에 미용은 교련 교사가 만든 이야기 속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자신이 본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저자가 된다.
〈일러두기〉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그 사람의 비밀을 많이 아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자신의 언어와 속도로 말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그 이야기를 내 해석으로 덮지 않고 듣는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광장 문장웹진 — 조경란 〈일러두기〉
수상·서지 확인출판유통통합전산망 — 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원문을 재수록하지 않고 필요한 사건만 요약하여 독자적인 감상과 비평을 작성했습니다.